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이 작품을 뮤지컬로 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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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기 전 수능 공부를 할 때에 백석의 시는 여럿 배웠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는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여서, 나는 한창 유행하던 싸이월드 게시판에다 아무런 덧붙이는 말 하나 없이 이 시를 그냥 그대로 옮겨 놓기도 하였더랬다. 그 시는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와 같다. 이 시를 읽으며 어릴 적 감상적이기만 했던 내가 느꼈던 감상들을 일일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아직도 첫번째 연을 읽으면 가슴이 아릴 듯 아프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엔 푹푹 눈이 나린다니.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생각하며, 그래, 나를 사랑하는 나타샤는 나에게 아니 올리 없지, 하는 헛된 생각을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면서도, 흰 당나귀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와 둘이서 꽁냥꽁냥 살을 생각을 하며 흰 당나귀의 울음 소리를 떠올리는 백석이라니.


나는 저 응앙응앙 하는 흰 당나귀의 울음소리가 너무 좋았다. 이런 내 마음을 어찌 알았던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객석 이름 중에는 응앙응앙석이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믿어 줄 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응앙응앙이란 말이 좋아서 응앙응앙석 티켓을 샀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 뮤지컬은 이 시에 대한 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산산히 조각 내었다. 그런데 사실 이 것은 뮤지컬 탓만은 아니다. 몇 해전 나는 우연히 백석 평전인가 뭔가, 아무튼 그런 책을 읽다가 백석이 아주 나쁜 놈이라는 걸 알았다. 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어쩌고, 그러다 기생인 자야를 만나서 어쩌고, 그러다가 자야 몰래 결혼을 했다가 어쨌다가, 아무튼 아주 나쁜 놈이었다.


뮤지컬에서도 백석의 연인 (시에서 나타샤로 대변되는) 자야가 자기 몰래 결혼을 하고 온 백석에게 성을 내자 백석은, '결혼을 했지만 마음은 주지 않았소!' 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 때 관객들은 다들 어이가 없어 웃는다. 사실 극에서도 살짝 웃음을 유도한 것이었던 것 같고... 어린 나는 백석이 이런 나쁜 놈인 걸 몰랐고 그저 시가 좋아 백석을 좋아했는데, 백석의 실제 삶에 근거하여 만든 이 뮤지컬은 별 수 없이 대학 시절 정말 애정하던 나의 시와, 그 시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산산히 조각낼 수 밖에 없었던 거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고,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랑에까지 나눠 줄 감동따윈 나에게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가사로 만든 주제곡 또한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곡들은 참 좋은 것도 많던데 왜 하필 주제곡이 안좋지?


초반에는 곡도 좋고 배우도 좋고 연기도 좋아 집중해서 관람하였지만 중반 즈음 넘어가니 스토리가 늘어지기 시작해서 무척 지루했다. 인터미션도 없이 한시간 반 정도밖에 안되는 극이 었는데 이렇게 중간에 지루하기도 힘들텐데.


소극장 뮤지컬에 만족했던 적은 살면서 단 한번 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기 전부터 그리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다짐을 하는 편이지만, 이 공연은 평도 무척 좋았고 워낙 좋아하는 시였고, 백석의 시로 가사를 만든 노래가 좋지 않을리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말았나보다.


눈 나리는 숲 속의 하얀 당나귀는 어딘가에 메여 처벅처벅 헛발질을 해 대고, 사랑하는 나타샤와 그 당나귀에 올라타서 어디론가 떠나고픈 남자는 오지 않는 나타샤를 기다린다. 아니, 날 사랑하는 나타샤는 나에게 오지 않을리 없다며 자꾸 속으로 부질 없는 기대를 되뇌이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풍경. 


내 머릿 속엔 하나의 풍경화처럼 자리 잡았던 이 그림은 이제 없어지고 말았다.





이러쿵 저러쿵 불평은 하였지만, 자야 역의 최연우 배우는 연기도 노래도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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