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016 :: 오뉴월 감기와 남편의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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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16 :: 오뉴월 감기와 남편의 김밥


걸리면 바보라는 오뉴월 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지독하게. 고등학교 때였나, 한창 사춘기 시절에 코감기에 걸려 고생하는데, 코감기 걸린 사람 너무 더러워 보여! 라는 남자인 친구(?)라기엔 그냥 학원 같은 반 아이의 말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내가 봐도 정말 더러워 죽겠다 싶을만큼 콧물도 많이 나는 감기였다.


목감기면 목감기, 코감기면 코감기 하나만 하면 좋을텐데, 목도 아프고 콧물도 정말 장난 아니게 많이 나고 열도 나고 기침도 엄청 심하게 나서, 뭐만 먹으면 웩웩 토할만큼 고생을 심하게 했다. 잠을 잘 때도 자다가 코가 막혀 깨거나,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을 쉬다가 마른 목이 아파 깨거나 해서 거의 잠도 자지 못했던....


일주일이면 나을거야, 생각하고는 집에 있는 약이나 챙겨 먹으며 버텼는데 그런 나를 지켜보는 남편은 영 입맛이 없어하는 내 걱정이 되긴 했었나보다. 먹고 싶은게 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냉채 족발! 양대창! 굽네 볼케이노 치킨! 등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음식들만 말하니 속이 터졌겠지. 주말에 잠깐 플러싱 (뉴욕에 있는 한인타운)이나 다녀올까? 생각을 해봐도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 2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금세 들었다.


그러다가, 그래! 김밥! 김밥이 먹고 싶은 것 같아! 하는 내 말에서 남편은 희망을 찾았다고 했다. 사실 내가 느끼기엔 김밥도 그리 먹기 쉬운 음식은 아닌데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차곡차곡 주변의 여러 Asian Market 들을 돌며 재료를 사모았다. 그리고는 어느 일요일 아침, 남편의 생애 첫 김밥싸기 미션이 시작되었던 것.





남편의 첫 작품이다. 남편은 부끄럽다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지만 이런 걸 사진으로 남겨야지 뭘 남기냐며 한 컷.





저렇게 두줄쯤을 터트리고 난 후 드디어 그럴듯 해보이는 김밥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근데 나는 터진 김밥 두줄을 엄청 맛있게 먹고 났더니 이쯤 되니 배가 불러 제대로 된 건 거의 못 먹었다는 슬픈 진실.....


단무지와 우엉인가?가 함께 포장되어 있는 김밥 재료 셋트를 용케 구하고, 달걀, 오뎅, 당근, 오이는 집에 있던 것. 김밥 김도 운 좋게 구하기는 했는데 200장인가가 들어있는 김을 정말 큰 돈을 주고 사온 바람에 한 소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밥의 생명은 맛살 아니냐!고 나는 항의하였지만 맛살과 김밥 햄 등은 결국 구하지 못해 미리 삶아 짠맛을 쫌 빼난 스팸을 넣었다. 당근과 오이는 채썰어 볶을 때 훨씬 맛이 좋다고 해서 채까지 썰어 열심히 준비하더라. 이렇게 고생을 하며 만드는데 과연 맛이 괜찮을지 의문이었는데 결과는 정말 놀랍도록 맛있는 김밥이었다.


이 때만 해도 내 몸 아픈게 제일 큰 문제라 그 고마움을 잘 못느꼈는데 좀 살만해지고 나서 우연히 사진을 다시 보니 눈물이 글썽 할만큼 고맙다.


나도 김밥을 싸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김밥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줄 몰랐더랬다. 이거 마치 잡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은 그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재료를 하나하나 준비해서 삶거나 볶은 후 또 정성스레 김 위에 놓고 말아야 한다. 초보자는 밥 양과 속의 양을 맞추는 것도 일이다. 김밥은 김밥 천국 같은 데서 다른 메뉴 옆에 놓고 먹는 음식으로만 알았는데, 남편이 싸준 김밥을 먹을 때에는 김밥 천국 김밥이 아니라 어린 시절 소풍갈 때 먹었던 엄마 김밥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가 소풍가는 날마다 그렇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이 고생을 하면서 김밥을 쌌던 걸까. 늦어도 너무 늦은 헤아림이네.


엄마 생각이 나서 한국 시간에 맞춰 오랜만에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컨디션이 안좋은데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이 김밥을 다 싸주더라, 처음 해봐서 너무 고생고생을 해가면서 싸더니 같이 먹고 나서는 바로 뻗어서 한 숨 자고 일어나더라, 김밥 먹으면서 엄마 생각이 나더라, 나름 촉촉한 목소리로 나는 말했는데,


그래 임마, 니는 김밥이 그럼 어디서 그냥 뚝딱 나오는 줄 알았나!

자비 없는 엄마의 꾸짖음. 그리고는 이어서, 그래도 OO이가 잘했네, 니가 그래도 시집은 참 잘갔다. 하시더라. 엄마가 사위를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다. 이 말은 남편한테는 비밀로 해야지. 그렇지만 우리 남편이 내가 많이 아프던 날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생고생해가며 김밥을 싸줬던 일은 절대 잊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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