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자유의지로 인생 살아보기,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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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자유의지로 인생 살아보기,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작가는 좋아하는 편이고, 이 책도 시선에 여러번 들어왔으나 이제서야 읽었던 이유라면, 아무리 유시민이라고 해도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누군가에게 훈계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유시민이라고 해도,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하는 제목은 너무 거만한 것 아닌가, 하는 뾰로통한 마음이 조금 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곳에서 들리는 이 책에 대한 감상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안 읽히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뒤가 궁금해 지도록 재미있더니, 금세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감상은? 그래도 읽길 잘했다.

 

책은 다음과 같은 4개의 큰 장으로 나뉘어 있다.

 

제 1장. 어떻게 살 것인가
제 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제 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제 4장. 삶을 망치는 헛된 생각들

 

각각의 장에서 처음에는 유시민 작가 스스로의 삶을 담담히 회고하며 그때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지, 그래서 깨달은 바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방송을 통해 유시민 작가를 많이 보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새롭다고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어쨌든 삶은 스스로 즐거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결국엔 자유의지로 대변되는 올바른 삶으로의 열쇠를 과연 나는 잘 사용하였던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인생의 불운이나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되었을 삶의 불공정함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완전히 공감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려는 청년들에게 두런두런 자기 인생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각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다. 약간 투머치토커의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청년들이 느꼈을 절망이나 이미 생긴 상처를 위로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사실은 모든 말들이 다 뻔한 이야기들이고, 읽다보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뻔한 말들을 유시민 작가가 경험을 토대로 풀어놓으니 이렇게 스스로를 깊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구나, 새삼 놀라웠다.

 

심각하기만 하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도 않아서 강약 조절을 하며 잘 따라가다 보니 뭔가 뭉클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물론 나에게도 좋았지만, 나보다 훨씬 젊은, 이제 막 세상으로 떠밀려 나온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읽으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1.

아주 맞는 말들이라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하였으나, 유시민 작가는 너무나 엘리트이(였)기 때문에, 뭐랄까 이런 관점을 보편적인 청년들에게 적용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

유시민 작가 스스로의 삶에서 정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들어간 그의 정치 인생, 그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글을 쓰던 시점까지 가지고 있던 정치에 대한 신념들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 밑줄 긋기

 

#00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이 괴로웠던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괴로운 게 꼭 해로운 건 아니다. 나는 학교 음악실에서 존재를 감추고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과 더불어 사는 요령을 배웠다.

 

#01

나는 그들이 부럽다. 노래를 좋아하는 만큼 잘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노래만 그런 게 아니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 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02

그들이 처음 밴드를 만들었던 그 나이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돌아보니 나도 그때 세상과 나름 격렬하게 부딪쳤다.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그 나이에 나는,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구국의 결단’을 제 멋대로 내려 대통령 자리를 도적질한, 개성 있는 외모를 가진 무식한 장군한테 대들었다가 크게 혼이 나는 중이었다.

 

#03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solidarity라고 나는 믿는다.

 

#04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05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06

오래전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실존주의 사조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 이런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지 못하면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들이 쓴 책은 용어와 문장과 논리가 모두 난해하다. 되풀이해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다. ‘감히 건방지게!’ 이런 말을 듣더라도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쓴 유명한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를 차원 높은 ‘철학적 횡설수설’로 간주한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에게도 해묵은 ‘원한’이 있다. 소설 『성城』에 세 차례 도전했지만 한 번도 완독하지 못했다. 한글 번역본을 읽다가 두 번 포기했다. 번역이 엉터리라 그럴지 모른다며 유학생 시절 독일어판을 펼쳤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어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수준 높은’ 소설을 잘만 읽는데 카프카라고 안 될 리는 없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 결국 성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나도 카프카의 정신세계에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제발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란 말이야!’

 

#07

세상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너무나 많다. 곳곳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서 있다.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와 넘을 수 없는 벽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모든 나무와 모든 벽을 오르고 넘어서야 행복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적합한 나무, 노력하면 넘을 수 있고 넘는 게 즐거운 벽을 잘 골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인생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을 후회 없이 즐길 수 있다.

 

#08

삶은 곧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죽는다. 지금 책을 쓰는 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모두 죽는다. 생각할 능력이 아직 부족한 어린아이들, 어떤 이유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이 사실을 모른다. 실존주의자를 흉내내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다. 인간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다 살면 그때 죽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 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裏面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완성된다. 쉰다섯 해를 산 나는 이미 쉰다섯 해 죽은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삶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역逆이 옳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09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10

구한말 지식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자결,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焚身,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投身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었으나 그냥 사라지거나 망각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은 그 질문을 듣고 생각하면서 죽은 이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11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12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13

마흔 살이 되던 새해 첫날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그 생각 때문에 잠을 깼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필이면 왜 그때였는지 모르겠다. 꼭 그때였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어쨌든 그날 아침 인생의 끝을 얼핏 보았다. 무엇인가 내게 속삭였다.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았던 네 청춘의 열정은 바닥이 드러났다. 인생열차의 엔진은 식어버렸다. 이젠 오르막을 달릴 수 없다. 네게 남은 길은 평지와 내리막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런데 일반적 명제에 불과했던 이 말이 그날 아침 문득 존재의 자각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더는 지천으로 남아돌지 않았다. 삶이 무겁게 다가와, 오래 잊고 지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왜 사느냐? 남은 삶을 어떻게 살려 하느냐?

 

#14

거울 위 벽에 달린 조명등이 양쪽 눈 바로 아래 눈물주머니를 비추어 전에 없었던 초승달 모양의 그늘을 흐릿하게 드리워놓았다. 어깨에서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그것은 분명 노화老化의 징후였다. 네모난 거울 안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조금 안돼 보였다. 오래 알고 지냈던, 눈빛 반짝이던 그 청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찬물로 세게 얼굴을 문질렀다. 마흔이다. ‘저게 나란 말이군. 그런데 얼마나 남았지? 그래, 25년!’

 

#15

나도 남들처럼 훌륭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 인생이 훌륭할까. 일단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자. 그 일을 열정적으로 남보다 잘하자. 그리고 그걸로 밥도 먹자. 이것이 성공하는 인생 아니겠는가.’

 

#16

삶이 더 견디기 힘들어서, 또는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 그럴 때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걸로 살아볼 일이지!” 그러나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17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산다.

 

#18

그가 누구이든,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나의 삶과 내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없으면 내가 인식하는 세계 자체도 없다.

 

#19

레이건은 철학적 자아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의 담화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지성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이었다. 지는 해가 만드는 낙조는 일출만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낙조가 일출을 능가할 수 있다. 레이건의 마지막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20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21

그러나 자유의지가 제멋대로 살고 제 마음대로 죽는 것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 Imperativ’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22

라몬 삼페드로가 죽으려고 한 것은 고통, 절망 또는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지마비 장애는 자유를 박탈했다. 라몬은 자유 없는 삶은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칸트의 도덕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한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존엄성이며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살고 사랑하고 죽을 자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도덕과 법률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23

사지가 마비되면 자살한다는 준칙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라몬 삼페드로의 준칙은 그것이 아니었다. 라몬이 제안한 준칙은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주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스티븐 호킹과 라몬 삼페드로 둘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준칙이라고 생각한다.

 

#24

일, 놀이, 사랑, 이념, 지식, 돈, 명예, 권력…. 무엇이든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주는 기쁨과 의미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무엇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살아 있는 순간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는가?’ 라몬 삼페드로가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25

내가 쓴 책 가운데 제일 많이 팔린 것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던 여러 현대사 책을 ‘다이제스트’한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기간에 낮에는 명동에서 시위를 하고 밤이면 구로공단 근처 독산동 자취방에서 글을 썼다. 최루탄 분말 때문에 물집이 잡힌 목덜미를 물 적신 수건으로 덮고 앉아 새벽까지 썼다. 을지로에서 유인물을 찍어 나오다가 들켜 경찰 수배가 떨어지는 바람에 은평구 신사동 연립주택 반지하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밤낮으로 썼다. 남의 책들을 발췌 요약한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이 잘 팔린 덕분에 관악구 신림동 산비탈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어 장가를 들었다. 독일 유학도 갈 수 있었다. 한번도 꿈꾸어 본 적이 없었던 글쟁이가 되었으니, 인생은 역시 계획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26

그래서 직업은 귀천貴賤이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래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말이 규범적 역설逆說이라고 생각한다.

 

#27

천부적 재능이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고난 음악 신동은 시키지 않아도 몇 시간씩 피아노를 친다. 타고난 지적 재능이 있는 아이는 강요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재능이 있으면 재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더 집중한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결합한 ‘1퍼센트 재능과 99퍼센트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 그런데 재미를 느끼고 집중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28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냉혹한 과정인지 모른다. 원대한 꿈과 낭만적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영화배우, 축구 선수, 교사, 판검사, 변호사, 외교관, 소설가, 기업가…. 아이들은 마음대로 꿈을 정한다. 스스로 정하든 부모가 권하든 백지에 그림 그리듯 할 수 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그려도 좋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다른 것을 그려도 된다.

 

#29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30

그러면 왜 정치를 했는가? 내게 정치는 연대solidarity의 한 방법이었다. 연대는 아픔과 기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사회적인 선과 미덕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정치는 스무 살에 야학교사를 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31

정치는 사회적 연대의 가장 차원 높은 형식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그것도 그냥 국회의원 정도가 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 자리를 목표로 삼는다면, 권력투쟁을 놀이처럼 즐거운 일로 여기면서 그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인생을 통째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높은 지지율은 이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저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런데 인기란 아침 안개와 같아서 저 혼자서 밀려왔다가 때가 되면 저 혼자 녹아 없어진다. ‘좋은 생각’과 ‘착한 이미지’로 인기를 잠시 붙잡아둘 수는 있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을 구축할 수는 없다.

 

#32

갑작스럽게 찾아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상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색깔과 맛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은 싹 난 감자처럼 아린 맛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리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33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삶은 똑같이 귀한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이다.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야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다. 자식이든 친구이든 타인에게 의존하면 삶은 존엄과 품격을 상실할 수 있다. 늙어도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설계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를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 돈, 건강, 그리고 삶의 의미이다.

 

#34

강연이나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진보주의란 무엇이며 보수주의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진보주의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라고 이해하면 그 차이를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35

나이, 인종, 교육 수준, 소득 수준, 종교 등의 영향을 배제할 경우 IQ가 높은 청소년일수록 진보 성향이 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의 정치적 진보성과 청소년기의 IQ는 단조증가單調增加 관계를 나타냈다. 강한 진보적 정체성을 가진 미국 시민은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가진 시민보다 평균적으로 11점 이상 청소년기의 IQ가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지능의 영향력은 성이나 인종보다 두 배나 강력하다.

 

#36

우리는 어디까지 참여해야 할까? 누구나 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이타 행동의 한계는 정해진 것이 없다. 어디까지 해야 바람직한지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까지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고, 그저 작은 성금을 보내는 정도만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것이다. 사람은 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누구도 타인에게 어떤 이념이나 공동선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느끼는 만큼,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37

왜 그래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 이전에 마음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불편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비용이 들고 고생이 되는데도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고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문명과 교육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나와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들의 복지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사적 자원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자발성, 이 모두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재능이며 본능이다. 이런 이타적 본성,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연대는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의미 있고 존엄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제4원소이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

 

#38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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